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
2003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위한 문예인 공동행동] 결성
현지 주민, 시민 단체 등과 연대하여 서울과 대추리에서 문예 캠페인과 기지 확장 저지 투쟁 전개
(미군기지 확장 지역인 도두리는 정태춘의 고향 마을이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정태춘 박은옥 거리 Concert
"평화, 그 먼 길 간다"
2005.8월~10월 매주 화요일 저녁 / 광화문 교보문고 앞 거리에서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 중 현장 체포 당하여 입건, 재판. 유죄 판결(벌금형)
(주민, 평화운동가, 문화예술인 등 총 800여 명 이상 입건되어 재판받았고,
해당 지역 주민들 쫓겨나고 마을이 철거되면서 4년 여의 투쟁 종료됨)
정태춘에게 이 프로젝트는 가장 아픈 기억의 투쟁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 이미 진보 운동에의 조직적 가담도 접은 상황에서 "이건 내게 운동이 아니라 고향에 대한 사적 헌신일 뿐"이라며 뛰어든 투쟁. 그것은 개인적으로 과거 그의 <가요 검열제 철폐운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했던 사람들인 노무현(대통령) 천정배(법무장관)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일, 거기다 국민 대중과 평택 현지의 주민들이 대부분 철저히 무관심하거나 외면했던 상황 또, 그의 정서적 자궁과 같은 그 광활한 고향 들판과 유년의 서정을 배태했던 모든 추억을 유린 당해야 하는 고통, 결국은 그 정부의 공권력에 의해 현장 체포 당하고, 처음으로 유치장에 갇히고 오랏줄에 묶여 이동하고, 그 사이에도 전자 지문 날인을 거부하며 저항하고, 구속 수감은 면했지만 재판정에 불려다니고, 결국은 유죄 판결을 받고... 하는 전 과정이 역사적 아이러니이거나 한 개인의 정치적 치욕 비슷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고립된 대추리 도두리 고향 주민들의 외로운 투쟁에 문화예술인들의 조직적 가담을 추동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3년 여 그 문예 투쟁에 앞장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싸움은 젔지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인자들로 결합된 문예인들("들사람들")과 그들의 새로운 방식의 진보적 문예공동행동("들이 운다" 프로젝트)은 한국 문예 실천 운동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고, 적지 않은 문예적 성과를 내며 유의미하고 풍부한 아카이브를 남겼다.
이 <대추리 투쟁>은, 이전의 <누렁 송아지>나 <가요 검열제 철폐 투쟁>, 그 시기의 다양한 <진보적 문예 실천 운동>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정태춘의 입장과 그의 의지에 대한 아내 박은옥의 동의와 지원, 동참으로 가능했다.
정태춘에게 이 투쟁은 국가 권력, 국가 폭력과의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조우의 기회가 되었고 또한, 변방에 고립된 소수자들의 자위적 저항을 철저히 외면하는 새로운 산업사회의 무기력한 시민 대중의 진면목을 절감하는 체험이 되었다.
이후, 그는 이 새로운 산업 "문명의 열차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고 선언하며 시스템으로부터 "스스로 유배"의 길을 선택한다.
그것은 대추리 투쟁이 결코 여기 대한민국이라는 국내 문제일 뿐이거나 한미간의 다만 정치 군사적인 문제에서만 연원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었고 또, 이러한 한국 대중들의 냉담한 변화가 그 사이에 무자비하게 환골탈태한 세계 산업주의에 의한 것임을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이 상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회과학적 접근 방법을 넘어서는 더 원리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준거에서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즉, 작금의 세계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기 산업문명과 그 문명사 전반의 윤리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그 토대 위에서 인간과 세계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